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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양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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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무소
    댓글 0건 조회 10,072회 작성일 15-05-17 14: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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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산양개 스님.

     

     

     

     

     

     

     

     

     

     

     

     

     

    출가자 길 선택한 소년 양개 - 깨달아 큰 은혜 갚을 것 약속

    금생에 몸과 생명 버릴 때까지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

    양개 어머니 문간에 기대서서 눈물로 출가한 아들 기다려

    마침내 아들 뜻 받아들이고 깨달음 반드시 이룰 것 당부

     

    “어릴 때 젖을 먹이고 길러주신 은혜가 깊고 깊으니

    온갖 재물과 좋은 음식으로 봉양할지라도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한량없는 부모님 은혜를 갚으려면 출가만한 공덕이 없을 것입니다.

    ‘자식 하나가 출가하면 구족(九族)이 천상에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는 강처럼 흐르는 생사의 애욕을 끊고, 번뇌 가득한 고통의 바다를

    뛰어넘어 만겁의 자애로운 육친에게 보답하고자 하나이다.

     

     금생의 몸과 생명을 버릴 때까지 맹세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야를 밝히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부모님께서는
    부디 자식에 대한 애착을 버리소서.

    다시는 기억하지 마소서.”

     

    10살 남짓 된 양개(洞山良价, 807∼869)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있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환히 안다는 오설산(五洩山)

    영묵(靈黙, 747~818)선사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년 양개의 마음에 궁금증이 똬리를 튼 것은 ‘반야심경’을 외우면서다.

    절강성(浙江省) 회계(會稽)에서 태어난 양개는 돈독한 불심을 지녔던

    부모님 덕에 8살 무렵부터 절에서 지낼 수 있었다.

     

    양개는 절에서 심부름과 글공부를 해야 했지만 그 생활이 싫지 않았다.

    어느날 주지스님이 양개에게 ‘반야심경’을 외우라고 시켰다.

    총명했던 양개는 하루 이틀 만에 술술 암송할 수 있었다.

    주지스님의 다 외웠냐는 물음에 양개는 되물었다.

    “스님,

    제게는 눈, 귀, 코, 혀 등이 다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는 없다고 하는 건가요?”

    양개의 갑작스런 물음에 주지스님은 말문이 꽉 막혔다.

    그는 양개가 자신이 감당할 재목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는 오설산에 주석하는 영묵선사를 떠올렸다.

    영묵은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마조도일(馬組道一, 709~788)의 법을 이은

    뛰어난 선승이었다.

    그라면 영특한 양개를 선문(禪門)의 사자로 키울 수 있으리라 여겼다.

    양개는 주지스님의 뜻을 선뜻 받아들였다.

    오설산에 가면 모든 의문을 풀 수 있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막상 떠나기로 결심하자 양개의 마음에 선연히 다가온 것은 부모였다.

     양개가 불교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절에서 생활한 것도 신심 깊은 부모의 영향이었다.

    그의 부모가 어린 양개를 절로 보낸 데에는 기도로 낳은 아이가

     절에서 공덕을 많이 쌓아 무탈하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렇다고 자식이 평생 출가사문으로 살기를 바랐던 건 아니었다.

    그같은 부모의 마음은 어린 양개도 잘 알았다.

    허나 양개는 출가자의 길이 불효라 여기지 않았다.

     아무리 귀한 선물과 맛난 음식으로 부모를 호강시켜드려도

    죽고 사는 생멸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는 없었다.

    양개는 일생이 아닌 천생만겁(千生萬劫)에 걸친 자애로운

    부모의 은혜에 보답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양개는 붓을 들었다.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 세상에 나오실 때 부모님에게 의탁해 몸을 받은 것이요,

    온갖 만물이 생겨날 때도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은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들은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에 젖어있습니다.”

    양개의 편지는 부모의 지중한 은혜로 시작됐다.

    이어 출가의 공덕이 가장 크니 양친께서는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

    인연에 얽매이지 말고 부처님의 부모인 정반왕과 마야왕비를 본받기를 당부했다.

    또 자신이 부모를 모시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이며,

    금생에 반드시 영겁의 번뇌를 반야지혜로 밝히겠다는 각오도 덧붙였다.

     

    양개는 고향을 떠나 오설산으로 향했다.

    수십 년 간 선지식을 찾아 행각하게 되는 발초첨풍(撥草瞻風)의 첫 발걸음이었다.

    양개는 영묵선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하지만 그들을 엮은 인연의 끈은 그리 질기지 않았다.

    양개가 오설산에 도착하고 오래지 않아 영묵이 세연을 접은 것이다.

     양개는 이곳저곳 도량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선을 닦고 경전을 익혔다.

    21살 때에는 하남성(河南省) 서쪽의 숭산(嵩山)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도첩(度牒)을 얻은 양개는 이제 본격적으로 구도행각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그 무렵 양개는 고향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부친은 이미 돌아가셨고 형과 아우가 효도를 다하지만

    모친은 매일 눈물로 자신을 기다린다는 얘기였다.

     양개의 가슴은 미어졌다.

    출가자라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없을까.

     양개는 어머니를 위해 다시 편지를 썼다.

     

    “자애로운 어머니께서는 섭섭한 생각 거두시고 뜻을 잘 다스려

    부처님께 귀의하옵소서.

    이별의 안타까움 품지 마시고

    문간에 기대 출가한 아들 돌아오기를 바라지 마시옵소서.

    무릇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효도를 해야 하늘의 마음에 합치되는 것이요,

    승려는 절집에서

    도를 흠모하고 참선해야 자비로운 부처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께 아뢰오니 이제 슬퍼 마시옵고 죽은 자식,

    없는 자식이라 여기옵소서.”

     

    인편에 편지를 보낸 지 오래지 않아 양개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애틋한 그리움이 가슴에 옹이처럼 박혔을 어머니가 손수 써 보낸 편지였다.

     

    “보내 온 글을 보니 출가에 대한 너의 뜻이 굳건하구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늙었지만 네 형이나 동생들이 복덕이 없어

    춥고 가난하게 사니 내가 어찌 그 애들에게 의지해 살겠느냐.

    자식이 어미 모시기를 포기하더라도 어미는 자식을 버릴 마음이

    조금도 없구나. 네가 훌쩍 다른 지방으로 떠난 뒤 아침저녁으로 쉴 새 없이

    눈물이 흐르니 참으로 괴롭구나.”

     

    어머니는 편지에서 가슴 속 깊은 슬픔을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양개에 대한 당부의 말을 써내려갔다.

    “나는 네가 (지극한 효성으로) 얼음 위에 누운 왕상(王祥)이나

    부모 얼굴을 나무에 새겨 모셨던 정란(丁蘭)처럼 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네가 목련존자와 같이 나를 제도해 끝없는 괴로움으로 가득한

    생사의 바다를 벗어나 부처님 세상으로 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깊은 허물이 있으리니, 부디 도를 깨달을지어다.”

     

    어머니의 편지를 받아든 양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인들 남들처럼 어머니 곁에서 봉양하고 기쁘게 해드리고 싶지 않겠는가.

    허나 그것은 양개가 지향하는 효가 아니었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부모를 억겁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그는 잘 알았다.

    양개는 한시도 어머니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강서, 호남, 안휘, 호북, 장안 등 눈 밝은 선지식이 있는 곳이라면

    천리가 멀다않고 찾아 나섰다.

    그 중에는 마조도일의 법을 이은 남전보원(南泉普願), 백장회해의 법을

    이은 위산영우(潙山靈祐)를 비롯해 운암담성(雲巖曇晟), 석상대선(石霜大善),

    서산해초(薯山海超), 백안명철(百顔明哲), 남원도명(南源道明),

    정상좌(政上座), 흥평(興平), 노조보운(魯祖寶雲), 패수혜성(稗樹慧省) 등

    기라성 같은 선승도 있었다.

     

    용산(龍山) 깊은 곳에 은거한 노승은

    “이 산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라며 놀라워했다.

    양개는 어떤 고승을 만나건 법에 있어서는 털끝만큼도 물러섬이 없었다.

    그가 살아생전 선문(禪門)의 전설이 된 만년의 남전보원(748~834)을

    만났을 때였다. 때마침 다음날이 남전의 스승 마조의 기일이었고,

    이때 팔순의 노승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중들에게 물었다.

     

    “내일 마조 스님의 재를 지내는데,  스님이 오실는지 모르겠구나.”
    대중이 모두 침묵하자 젊은 양개가 대답했다.
    “동반자가 있으면 오실 것입니다.”
    남전이 말했다.
    “이 사람이 후생(後生)이지만 다음어서 쓸 만하겠구나.”
    이에 양개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선사께서는 양민을 억압해 천민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만인이 우러르는 선의 종장 앞이었지만 양개는 사자처럼 당당했다.

    남전과의 선문답은 순식간에 그를 유명 선객으로 만들었다.

     

     수년간 남전 문하에서 사사받은 그는 다시 선지식들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 험난한 여정은

     굳건한 체력과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개가 법을 이은 스승 운암담성(782~841)을 만난 것도

     치열한 구도의 길 위에서였다.

    운암담성은 약산유엄의 법을 이은 선사로 당시 호남의 운암산에 머물러 있었다.

     위산영우(771~853)의 권유로 운암을 찾은 양개는 남양혜충국사가 제시한

     무정(無情)설법을 두고 선문답을 주고받았다.

     

    “혜충국사의 말에

    무정(無情)도 설법을 한다는데 무정설법은 어떤 이가 듣습니까?”
    “무정의 설법은 무정이 듣지.”
    “스님께서도 들으십니까?”
    “내가 듣는다면 그대는 내 설법을 듣지 못할 거야.”
    잠시 후 운암이 다시 물었다.
    “듣느냐?”
    “듣지 못합니다.”
    “내가 하는 설법도 듣지 못하는데 어찌 무정의 설법을 듣겠느냐?”
    “무정설법은 어느 경전의 가르침입니까?”
    “보지도 못했는가?

    ‘아미타경’에 이르되 ‘

    물과 새와 나무숲이 모두 부처님을 생각하고 법을 생각한다’고 했거늘.”

     

       

     

    ▲ 동산양개는 개울을 건너다 물 위에 비친 자신의모습을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림은 남송(南宋) 때 저명한 화가인 마원(馬遠)의

    ‘동산섭수도(洞山涉水圖)’ 일부. 그림에는 다음과 같이 시가 실려 있다.

     

     ‘주장자 끌고 많은 선지식을 찾아다녔으나          (携藤撥草瞻風) 

    산을 오르고 내를 건너는 번거로움 면치 못했네   (未免登山涉水) 

    발 닿는 곳이 모두 진리임을 알지 못하더니         (不知觸處皆渠)

    머리 숙여 한 번 보고 스스로 즐거워하네            (一見低頭自喜).’

     

     

    운암의 안목에 깊이 감탄한 양개는 그곳에서 수년 간 공부해 큰 진전을 이뤘다.

     양개는 운암산을 떠나기에 앞서 물었다.

    “스님께서 입적한 뒤 누군가 묻기를

     ‘스님의 초상(肖像)을 그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합니까?”
    “항상 본래인의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하라.”
    양개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자 운암이 다시 말했다.
    “양개 상좌여!

     이 깨치는 일은 정말로 자세히 살펴야 한다네.”

    양개는 그때까지 의문을 말끔히 씻어내지 못했다.

    그 뒤 양개는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운암이 말한 뜻을 대오(大悟)했다.

    그는 기쁨에 겨워 오도송을 불렀다.

    그 유명한 ‘과수게(過水揭)’가 그것이다.

     

    부디 다른 것을 쫒아 구하지 말라(切忌從他覓)

    자기와는 점점 더 멀어질 뿐이다(迢迢與我䟽)

    내 이제 홀로 걸어가는데(我今獨自往)

    곳곳에서 그와 마주치네(處處得逢渠)

    그가 이제 나 자신이요(渠今正是我)

    나는 지금 그가 아니라네(我今不是渠)

    모름지기 이렇게 터득해서 알아야만(應須恁麽會

    비로소 진여세계에 계합하리라(方得契如如).’

     

     

    마침내 산과 강과 달빛의 무정설법을 들을 수 있게 된 양개.

    깨침의 순간 그는 스승 운암과 더불어 자신을 낳아주고

    깨닫도록 독려한 어머니를 떠올렸을 듯싶다.

    4만6000여 사찰이 파괴되고 26만500여 승려가 환속해야 했던

    회창폐불(會昌廢佛, 841~846).

    그 모진 법난 속에서도 양개가 꿋꿋이 민간인의 옷을 걸친 채 도를 깨치려

    무던히 애를 썼던 데에는 어머니와의 약속이 컸으리라.

    양개는 큰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비로소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사를 걸치고서 일대사를 밝히지 못한 것이야말로 가장 괴로운 일”이라고

    말했던 양개. 일체의 번뇌와 속박에서 자유로워진 그는 30년이 넘는 만행을

    접고 강서성(江西省) 고안현(高安縣) 동산(洞山)에 법석을 펼쳤다.

    그때가 852년으로, 양개가 동산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양개는 19년간 동산의 광복사(廣福社)에서 수많은 선객들과 마주했다.

    선원에 머무는 500여 대중들 모두 직접 일을 해야 했으며,

    그 울력의 현장에서 숱한 가르침과 법거량이 이뤄졌다.

    양개는 좌선과 문답을 방편으로 그들이 생사사대(生死事大)를

    끝마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고는 했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요,

    나를 이룬 이는 벗이라.

    선한 이를 가까이하라.

     쑥이 삼이나 대 속에 나면

     붙들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고

    흰 모래가 진흙과 함께 있으면

    함께 검어지는 것과 같다.

    옥은 쪼지 않으면 그릇을 이루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못하면 도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어떤 흔적도, 어떤 자취도 없이 유유자적했던 동산양개.

    869년 3월, 63살의 그가 마지막 여행을 떠나려 했을 때였다.

     제자들은 스승이 입적하려 함을 알고 울부짖고 통곡했다.

    한참이 지나도 그치지 않자 양개는 홀연히 눈을 뜨며 대중에게 말했다.

     

    “출가사문으로서 마음에 걸리는 게 없어야 참된 수행이다.

    죽음은 괴로움을 마무리하는 기쁜 일이거늘

    그리 슬퍼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양개는 대중들에게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수행을 경책하는

    우치재(愚痴齋)를 준비토록 했다.

    그래도 연연해하자 7일 동안 삶을 연장해 매일 법을 설한 뒤

    방장실로 돌아가 단정히 앉은 채 원적(圓寂)에 들었다.

    조동종(曹洞宗)의 개조로서 임제의현(臨濟義玄, ?~867)과 더불어

    당말 최고의 선장(禪匠)으로 꼽히는 동산양개.

    그의 법은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과 운거도응(雲居道膺, ?~902)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어

    ‘삼국유사’ 저자인 일연(一然, 1206~1289)과

    조선초 생육신 설잠 김시습(雪岑, 1435~1493)도 조동선법을 계승했다.

    동산양개와 그의 어머니가 주고받은

     ‘동산양개화상사친서(洞山良价和尙辭親書)’는 11세기 후반

    중국에서 편찬된 ‘선문제조사게송(禪門諸祖師偈頌)’과

    스님들 교재인 ‘치문경훈(緇門警訓)’ 등에 수록돼 있다.

    이 편지들은 출가자들의 초발심을 되새기게 하는 동시에

     “부모가 정업(淨業)을 닦도록 하는 게 진정한 효도”라는

     불교식 효도관의 실례로써 크게 주목받았다.

     

    -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261호 / 2014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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